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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편집부 | 2008.02.27 00:00
    냉전은 미국 중앙정보국(CIA)과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 간 대리전이기도 했습니다. 두 기관은 인텔리전스 게임을 한 영원한 라이벌이었지요. CIA는 ‘철의 장막’ 소련을 들여다보고 스파이를 침투시키는 데 어려움을 겪은 모양입니다. 크렘린놀로지(kremlinologyㆍ크렘린학)란 학문 영역이 등장한 것이 이를 방증합니다.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의 행간(行間)과 퍼레이드 주석단 자리 분석은 이 세계의 기본이었지요. CIA 분석본부도 같은 작업을 했을 테지요. 우리의 국정원이 북한에 대해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인적 정보(HUMINT)가 약했던 CIA는 우회하기도 했습니다. 소련 위성국을 상대로 공작을 해 56년 흐루시초프 공산당 제 1서기의 비밀 연설문을 입수했다고 합니다. 스탈린를 격하해 중·소 분쟁의 발단이 된 연설이었지요. 이를 몰랐다면 크렘린 내 권력투쟁과 중ㆍ소관계를 제대로 읽지 못했을 것입니다. 미국이 고공 정찰기 U-2기와 정찰위성을 통한 첩보전에서 우위에 선 것은 ‘닫힌 사회’ 소련이 한몫했지요.

    KGB는 ‘열린 사회’ 미국의 빈틈을 헤집고 많은 개가를 올립니다. 돈으로 망원들을 매수했지요. 워커 미 해군 준위는 1968년부터 85년까지 소련의 정보원이었습니다. KGB는 그를 통해 100만 건의 미 해군 비밀 메시지를 해독합니다. 소련이 86년 아쿨라급 핵잠수함을 진수한 것은 그 덕분입니다. 워커 사건으로 미국이 뒤집혔을 때 KGB는 CIA 작전본부를 뚫습니다. CIA 보루지요. 러시아 담당 에임스는 85년부터 9년 동안 KGB와 후신인 연방보안부(FSB)에 정보를 팔았습니다. KGB는 그러나 거대 권력이었습니다. 60년대 중반 브레즈네프 서기장 탄생 이래 KGB가 국가 계획을 작성ㆍ집행했고, 정치국은 이를 추인하는 ‘고무도장’에 불과했다고 합니다(『KGB 커넥션』). 82년 안드로포프 KGB의장의 서기장 취임은 그 절정기였지요.

    냉전이 끝나면서 두 기관은 서로 적을 잃었습니다. CIA는 표류하고, KGB는 해체됐지요. 그러나 CIA는 9ㆍ11테러 이후, FSB는 푸틴 대통령 집권 이후 변화의 소용돌이에 빠져 있습니다. CIA는 국가정보국(ODNI)의 지휘를 받게 됐고, FSB는 KGB로 돌아간 듯합니다.

    다른 나라 기관들은 어떨까요. 새 도전과 수요에 맞춰 변화하고 있습니다. 국정원도 예외가 아닙니다. 케네디 미 대통령은 61년 현 CIA 본부 낙성식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여러분의 성공은 공표되지 않는다. 그러나 실패는 선전된다.” 정보기관이 음지에서 싸우는 국가 최강의 무기이기 때문일 것입니다.(내외신문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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