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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편집부 | 2007.12.09 00:00

    군내 최대의 조직 사건이었던 윤필용 사건에서 11기들이 주축이 된 하나회 출신 장교들이 대거 연루되어 상당수가 옷을 벗거나 징계를 받았는데 16기 중에서는 연루자가 단 한명도 없었다. 물론 16기에도 하나회 회원이 있었으나 튀는 인물이 없었고 동기생을 질시하거나 밟고 가는 법 없이 다들 맡은 분야에서 묵묵히 복무하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이다. 다들 군 생활을 짧게는 10년, 길게는 40년동안 했지만 서로 상부상조하고 의지하면서 순탄하게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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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사 16기. 시쳇말로 ‘뒤늦게 잘 나가는’ 기수다. 지난 5·24 개각에서 물러난 천용택 국방장관이 국정원장으로 기용되자 육사 16기는 언론으로부터 더 주목을 받았다. 장세동 안기부장, 이종찬 국정원장에 이어 또다시 육사 16기 출신 국정원장이 탄생했기 때문이다. 국민회의 정동영 의원이 몸을 빼는 바람에 뜬금없는 벼락 감투를 쓴 3선 의원 이영일 대변인이 ‘환갑에 능참봉’ 소리를 했다지만, 초선 의원 천용택에게는 ‘환갑에 당상관’이니 이쯤되면 주목을 받을 만도 하다.

    그런데 일부 언론에서 ‘오바’를 했다. “육사 16기에서 또 정보기관장이 나왔다”며 육사 16기의 명예를 과장해 훼손했기 때문이다. 그 기사의 일부를 옮기면 이렇다.

    “육사 16기에서 또 정보기관장이 나왔다. 5공 때 장세동(85~87), 문민정부 권영해(94~98), 현 정부 이종찬(98~99.5)씨에 이어 이번에 임명된 천용택 국가정보원장까지 무려 4명이다. 역대 정보기관장 거의 대부분이 육사 출신이지만, 4명을 배출한 기수는 16기 외엔 없다.”

    기사 내용대로 육사 16기에서 국정원장이 또 나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4명이 아닌 ‘무려 3명’이고 3명을 배출한 기수는 16기말고도 8기가 있다. 그래서일까. 천용택 원장과 육사 16기에 대한 얘기를 들려줄 것을 청하자, 천원장과 육사 동기인 목포 출신의 이 사업가는 대뜸 언론의 오보를 지적하는 것으로 말문을 열었다.

    “어떤 신문은 보니까 육사 16기가 현역 때 대장을 한 명도 못낸 ‘불운한 기수’였다고 하고, 또 ○○일보에서는 육사 16기 한 기수에서 사상 처음으로 안기부장·국정원장이 4명이나 나와 뒤늦게 빛을 보고 있다는 식으로 썼던데, 다 엉터리야. 우리 동기생 중에서 대장이 3명 나왔고, 안기부장도 3명 나왔어. 권영해씨는 우리 동기가 아니고 한 기수 위인 15기야. ○○일보가 군 관련 기사에는 비교적 정통한데 왜 그런 오보를 냈는지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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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은 4명에 1명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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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지만 사관학교의 한 기수에서 국가 정보기관의 책임자가 3명이나 나왔다는 사실은 예사롭게 지나칠 일이 아니다. 중앙정보부·국가안전기획부·국가정보원으로 이어진 역대 국가 정보기관장 현황 <표 1>을 보면, 직무대행(윤일균)과 서리(이희성·전두환)를 포함한 역대 부·원장 총 24명 중에서 5명(신직수·노신영·배명인·서동권·김덕)만 민간 출신이고 19명이 군 출신이다. 군 출신이 10명 중 8명꼴이다.

    그런데 이중 대부분이 육사 출신이지만 그중에서도 유독 8기와 16기에서만 3명이 나왔다. 중앙정보부를 창설한 초대 김종필 부장, 4대 김형욱 부장, 9대 이희성 부장서리가 8기생이다. 그러나 다른 기와 달리 5회에 걸쳐 무려 2000여명이나 임관한 8기생의 수효를 감안하면, 178명이 임관한 16기생 가운데 안기부장·국정원장 3명은 눈여겨볼 만한 숫자다. 그래서 “육사 16기가 뒤늦게 빛을 보고 있다”는 촌평이 나올 법도 하다.

    그러나 사실 그런 것만도 아니다. 우선 장군 진급자 통계를 보면, 육사 16기생들은 다른 기수에 비해 앞서면 앞섰지 결코 뒤지지 않는다. ‘육군사관학교 50년사 1946~1996’(육군사관학교, 1996)에서 밝힌 동기회별 인원 현황과 기별 장군 진출 현황을 종합한 <표 3>을 보면, 장성 진급자 수(45명)로 보거나 장성 진급률(25.3%)로 보아도 다른 기보다 뒤지지 않는다.

    사실 육사 16기로 임관한 178명 중에서 장군 진급자 45명은 적은 수가 아니다. 4명에 1명꼴로 별을 달았다는 얘기다. 이중 장관(將官)급 장성인 중장 이상 주요 인사(괄호 안은 현역 당시 보직)는 김학옥(국방부 조달본부장) 박익순(군 특명검열단장) 용영일(합참 정보본부장) 이중형(정보사령관) 장세동(경호실장) 정인균(국방대학원장) 천용택(합참 전략기획본부장) 등이고, 대장 출신은 송응섭(합참 차장) 신말업(3군사령관) 이필섭(합참의장) 등이다.

    이 밖에 고위 공직·정계로 진출한 16기 출신으로는 앞서의 장세동(전 안기부장) 이종찬(국민회의 부총재) 천용택(국정원장) 외에 정순덕(전 민자당 사무총장) 최평욱(전 철도청장) 등이 있고, 학계로 진출한 16기생으로는 육사 교수부장(준장) 출신의 정형식 교수(한양대 토목공학과)와 역시 육사 교수부 출신의 박병권 전 해양연구소 소장(대령 예편) 등이 있다.

    그런데도 군 내에서 ‘샌드위치 기수’라는 평가를 받는 것은 한 기수 아래인 17기의 개성이 상대적으로 강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중에서도 특히 개성이 강했던 이른바 17기 트리오라는 박노봉영(전 육참총장)·허삼수(전 청와대 사정수석)·허화평(전 청와대 정무수석) 3인. 두 허씨는 10·26 및 12·12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측근이었고, 김씨는 33경비단장이었다. 세 사람 모두 하나회 회원이었다.

    또 육군 참모총장을 내지 못한 기수였기 때문에 군 내의 그런 평가가 일반화되었는지도 모른다. 노태우 정부 말기에 육참총장 자리가 15기 이진삼 대장에 이어 17기 박노봉영 총장으로 건너뛰더니, 김영삼 정부 들어서 다시 17기에서 총장(김동진 대장)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 밖에도 이른바 4년제 정규 육사 1기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는 11기 이후, 전통적으로 짝수 기수보다는 홀수 기수가 더 개성이 강했다는 조직 문화의 특성도 16기에 대한 군 내의 평판을 형성하는 데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와 같은 평가를 뒷받침하는 객관적인 근거는 별로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필섭 전 합참의장의 말이다.

    “16기가 15기와 17기에 치인 샌드위치 기수라는 지적은 온당하지 않다. 더욱이 군대는 피라미드 조직이다. 따라서 어느 조직이나 비슷하지만, 기수 안배를 하다 보면 어떤 기에서는 참모총장이 나오고 어떤 기에서는 합참의장이 나오기도 했다. 13기에서도 참모총장을 못 냈다. 아니 못 냈다기보다는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서 합참의장과 참모총장으로 기수를 안배하다보니 그렇게 된 것일 뿐이다.”

    이른바 상명하복의 검사 동일체 원칙을 강조하는 검찰에서도 검찰총장이 나온 기수가 있고, 법무장관이 나온 기수가 있다는 비유였다. 그러나 이필섭 장군도 16기가 결코 개성이 강한 기수가 아니라는 데는 동의했다. 이장군은 16기의 특징을 한마디로 “개성이 강한 사람이 없고 화합을 잘하고 전우애가 깊은 동기”라고 말했다. 용영일 장군은 16기의 특징을 좀더 직설적으로 “정치 군인이 없는 기수”라고 표현했다.

    그렇다면 고도의 정치적인 판단을 요하는 자리인 안기부·국정원장 자리에 오른 장세동·이종찬·천용택 3인의 생도 시절과 군 생활은 어떠했을까. 육사 도서관에 보관된 ‘북극성 4293’(단기 4293년인 1960년 졸업 앨범)에는 세 사람에 대한 동료들의 평가가 이렇게 기술되어 있다. 그 무렵에 육사를 졸업한 엘리트 청년들의 글 솜씨와 사회 인식의 수준을 엿볼 수 있기에 원문대로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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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방미인 장세동 생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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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세동/서울 태생인 그는 마음씨 곧고 미남에다 건강하지. 노래를 못하나 운동을 못 하나 말을 못 하나 그 무엇을 못 하나. 솜씨도 비상한 가지수와 어휘 그대로의 팔방미인이다. 남을 위해 자기를 애써 돌보려 들지 아니하며 ‘궂은 일은 나부터’라는 슬로건 밑에 근면한 삶의 태도가 더욱 성실한 군인으로서 언제나 타인에 모범을 보여주었고 언제나 미소를 띤 그의 얼굴은 만인에 호의를 갖게 했다. 하기에 그는 뭇 동기생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고 부하를 갖고 큰일 해보겠다고 보병을 택한 그 야심에 정말 기대되는 바 크다.”

    “이종찬/태생이 국제 관문인 중국 상해(上海)여서인지는 모르나 첫 인상이 어딘지 광활한 성격의 소유자인 것 같은 감을 준다. 동기생간에는 얌전하다는 평도 있으나 누구에 못지않게 까다롭기로 유명하다. 우등생의 스타도 수월히 붙였던 경력에 한때는 Ring위원으로 분주했었다. 착실함과 침착이 항상 그의 몸에서 떠날 때가 없기에 실수가 없지만 그러기에 휴일은 마치 그를 위해 있는 듯 한 여인을 사랑할 수 있는 성실한 인간인 반면에 그 배후에는 진지한 논리가 있어서 신화를 창조하겠다는 데 주장의 특색이 있기도 하다.” “천용택/노(怒)하기 쉬운 다도해의 창파(蒼波)가 그를 길렀다. 그래서인지 대중 속에서도 쉽사리 발견되는 짙은 안색과 알맞게 터잡은 눈동자에서 품는 강한 인상은 누구에게나 짙게 머문다. 불꽃 같은 정열과 조화된 체구는 전형적인 남아임을 알게 한다. 무엇보다 외로운 사람들의 기억 속에 떠오르기 쉬운 희생심과 지긋한 나이는 벗들의 사랑의 초점이 되어왔다. 미지의 내일보다는 오히려 현실을 아끼는 충실한 삶은 불가능을 축소하면서 자신있게 살아간다. 그의 포성을 무색케 할 고함(高喊) 소리와 함께 포병으로 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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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브스토리로 유명한 이종찬 생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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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이 될 듯 말 듯한 치기어린 글이지만 때묻지 않은 순수함이 엿보이기도 한다. 당시 장세동은 2중대, 이종찬은 8중대, 천용택은 4중대 생도였다. 장세동의 경우, 생도 시절 그가 사진반 활동을 했다는 점이 이채롭다. 또 출생지가 전남 고흥인 그를 그의 가장 친한 동기생들조차 서울 태생으로 알고 있는 점도 흥미롭다. 이필섭 장군은 “같은 군인이었지만 그야말로 ‘군인다운 군인’이라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었다”고 장세동을 평했다. 경기고 출신의 이종찬 생도는 침상에 누워서 책 보는 모습이 앨범에 실릴 만큼 무덤덤한 책벌레였다. 그러나 부인(윤장순씨)과의 러브 스토리가 이미 생도 시절부터 유명했을 만큼 연애에도 재능이 있었던 모양이다. 이에 비해, ‘완도 촌놈’이었던 천용택 생도는 저학년 때는 ‘눈동자에서 품는 강한 인상’ 말고는 별로 눈에 띄는 청년이 아니었다. 그러나 동기들에 따르면 그의 성실함은 고학년으로 올라갈수록 주목을 받았다.

    천용택 원장에 대한 동기생들의 평가는 대체로 근면과 성실 그리고 전략적 사고로 모아진다.

    천용택 국정원장(62)은 전남 완도 태생으로 완도중학교와 목포 문태고를 졸업했다. 완도중을 1등으로 졸업한 가난한 수재였던 천원장이 공립 목포고가 아닌 사립 문태고를 다닌 데에는 그만한 사연이 있다. 중학 졸업 후 ‘연습삼아’ 먼저 응시해본 문태고 입학시험에서 덜컥 수석을 해버린 것이었다. 학교에서는 당연히 장학금을 내걸고 수석 입학생이 다른 학교로 진학하는 것을 막았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 사정 때문이기도 했지만 결국 천원장은 교사들의 설득에 못 이겨 문태고에 남았다. 집에서는 공부 잘하는 아들이 고등학교 졸업 후 고향에서 면서기가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는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리고 당시로서는 유일하게 숙식 걱정 없이 공부할 수 있는 4년제 대학인 육사를 선택했다.

    그러나 청운의 꿈을 품고 간 육사 입교 초기에 그는 별로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남 앞에 나서기를 꺼리는 과묵한 성격 탓도 있지만, 당시 육사는 세칭 명문고 출신들이 주류를 이뤄 ‘완도 촌놈’이 행세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56년에 입교한 16기 생도는 225명이었는데 그중 서울의 5대 공립(경기·경복·경동·서울·용산고) 출신이 절반을 넘었고, 나머지도 태반이 지방 명문고 출신이었다. 그런만큼 우수한 학생이 많았다. 그러니 서울에 기반도 없고 선후배도 없었던 그로서는 조용히 학과 공부나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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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스라엘 시찰 장교단의 임동원과 천용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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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동기생 사이에서 사리 분별력이 특히 뛰어나고 매우 열성으로 후배들을 훈육했던 성실한 생도로 기억되고 있다.”(이필섭 장군) “당연히 그는 고학년이 될수록 서서히 두각을 나타냈다. 그의 명석한 두뇌와 잠재력이 발휘된 것이다.”(정인균 회장)

    이필섭·정인균 장군은 중대 단위로 훈육활동이 이뤄지는 육사 교육과정 3년 동안 제4생도중대에서 함께 생활했다. 두 사람에 따르면, 포병 소위로 군문에 첫발을 내디딘 청년 장교 천용택에게 큰 영향을 준 것은 그로서는 첫 해외여행이었던 이스라엘 시찰이었다. 다음은 정인균·이필섭 장군의 회고다.

    “천장군이 그때 이스라엘 시찰 장교단에 낀 것은 동기생의 자랑거리였다. 그가 동기생 중에서 유일하게 이스라엘에 시찰 장교단에 선발된 것도 그의 전략적 식견이 탁월한 덕분이었다. 이스라엘 다녀와 그 분야에 대한 연구와 공부를 많이 했다.”(정인균)

    “청년 장교 시절에 이스라엘에 다녀와 깊은 감명과 사상적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나중에 합참에서 함께 근무할 때도 이스라엘 군대의 장점을 도입한 강군 육성 방안을 모색했다. 알다시피 이스라엘 군대 모델은 요즘 말로 하면 ‘투명성이 제고된 군대’이고 ‘간편한 군대’이다. 천장군은 거기에 대한 아이디어가 많았다.”(이필섭)

    70년대 초 박정희 대통령은 당시 이스라엘과 중동의 6일 전쟁이 끝난 뒤 영관급 엘리트 장교들을 선발해 이스라엘에 보냈다. 당시 시찰 장교단의 인솔 실무 책임자는 육사 교수부 출신인 임동원 중령(13기)이었다.

    임장관은 당시 중령으로 실무 팀장을 맡았다. 그 장교단에 육사 16기로 소령이었던 천용택 국정원장도 포함돼 있었다. 임동원 통일부장관은 34년 평북 출생으로 57년 육사 졸업 후, 61년부터 69년까지 육사 교수를 지낸 학구파다. 소령으로 예편한 후 중앙정보부로 들어간 이종찬 부총재 또한 그 무렵에 육사 교수부에 근무했다. 두 사람은 주로 이북·서울 출신으로 육사 교수부에 근무했던 장교들이 중심이 되어, 영남 출신 장교들이 주축이 된 하나회에 맞섰던 청죽회의 핵심 멤버였다. 후일 중장으로 예편후 김영삼 정부에서 비상기획위원장을 지낸 천용택씨를 김대중 캠프에 끌어들인 인물이 바로 이스라엘 시찰 장교단의 실무 팀장이었던 임동원 당시 아태재단 사무총장과 이종찬 부총재였다. 이스라엘에서의 인연은 그가 군에서 ‘작고 강한, 효율적인 군대’의 모델을 추구했던 계기였을 뿐만 아니라 뒤늦은 정계 입문의 단초였던 셈이다.

    현역 시절 천원장은 늘 2차 진급자였다. 그러나 그의 출신 지역을 떠나 동기생들에 비해 능력과 실력이 뒤져 2차 진급한 것은 아니었다. 동기 송응섭 장군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나폴레옹은 포병이었다. 사관학교 지망생 중에는 나폴레옹 같은 위대한 지휘관이 되려고 포병 병과를 지망한 사람이 많다. 일부 언론에서는 천장관이 다른 동기들에 비해 진급이 뒤처졌다고 보도했지만 그런 식으로 단순 보도해서는 안 된다. 보병에 비해서 늦었을 뿐이지, 포병 병과 동기생 중에서는 천용택·김학옥 동기가 늘 1차로 진급했다.”

    목포 출신으로 같은 포병이었던 (주)씨피씨 박규종 회장(16기·대령 예편)도 비슷한 이유를 댔다.

    “당시 육군 진급심사에서는 ‘고생하는 보병’을 우대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고, 그래서 포병 출신인 천장군에게는 2차 진급 순번이 돌아간 것이다. 그러나 포병 출신 중에서는 늘 선두로 진급했다. 어차피 중장에서 대장 진급하는 데는 운이 따라야 하는 것 아닌가.”

    앞서 밝힌 대로 그의 동기생 중에 대장 진급자는 이필섭·송응섭·신말업 장군 3명이다. 그중 두 사람은 하나회 회원이다. 노태우 정부에서 대장으로 진급한 두 사람은 9공수여단장·9사단장을 지낸 노대통령과의 군 시절 근무 인연을 가진 장교들을 지칭하는 9·9 인맥이기도 하다. 어쨌든 하나회 회원 동기들에 대한 동기생들의 불만이 있을 법도 하지만 천원장은 물론 다른 동기생들한테서도 그런 내색을 찾아볼 수 없다. 육사 16기 하나회 회원은 장세동·정순덕(전 민자당 사무총장)·최평욱(전 철도청장)·이필섭·송응섭 등이다. 그런데 천원장의 교우 관계를 보면, 가깝게 지내는 사람이 이필섭·송응섭·박익순 세 사람이다. 두 사람은 하나회 회원이고 중장으로 예편한 박장군은 김영삼 정부에서 천원장 후임으로 비상기획위원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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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병 출신 한 명도 없는 16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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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점에서 정인균 회장이 강조하는 육사 16기의 특질은 인화와 지성이다.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것은 동기생들간의 동질성이었다.

    “16기생은 225명이 입교했는데 사병 출신이 한 명도 없는 유일한 기수이다. 전시(戰時)에 진해(鎭海)에서 입교한 11기부터 4년제 육사 정규과정이 시작되었지만, 11기부터 15기까지는 사병 출신 입교자들이 꽤 많았다. 그런데 16기에는 사병 출신 입교자가 한 명도 없었다. 물론 당시에도 사병들이 많이 응시했지만 성적이 낮아 다 떨어진 것이다. 다 똑같이 경쟁해서 들어왔지만 사병 출신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16기 입교생들의 성적이 우수했고 동질성을 띠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당시 육사 경쟁률이 28:1이었고 커트라인이 최고로 높아 신문에 기사화되기도 했다. 합격자 대부분이 서울대·연고대 복수 합격자였다. 나도 그때 연세대에 합격했으나 육사를 택했다. 따라서 16기는 전원이 고교 졸업 후 사회 경험 없이 바로 들어왔기 때문에 다른 기수에 비해 상대적으로 순수성과 동질성을 띠었다. 바로 그 점이 육사 16기의 특질 중 하나인 인화 단결에 밑거름이 되었다고 본다.”

    그래서일까. 16기 동기회는 다른 기수들에 비해 무척 활발하다. (주)대우건설 이만진 전무(16기·대령 예편)의 가시돋친 농담이다.

    “11기는 대통령을 두 명이나 냈지만 동기회는 잘 안 되고 있다. 아마도 사병 출신 육사 졸업자 대통령이 있어서 그런 모양이다.”

    실제로 화랑동기회는 매주 수요일에 서울 개포동에 있는 동기회 사무실에서 오찬 모임을 갖지만 늘 40~50명이 나온다. 지난 6월2일에는 오전 중에 폭우가 쏟아지는 불순한 날씨였는데도 50명쯤이 나와 바둑 대결을 하고, 삼겹살 오찬 후에는 게이트볼 강사를 초청해 이론과 실습을 했다. 사무실 칠판을 보니 청계산 부부동반 등산 같은 동기 모임과 총동창회 주최 이스라엘 대사 초청 조찬 강연 일정 등이 촘촘하게 적혀 있다. 군에 있을 때보다 은퇴 후 더 바쁘게 지내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동기들의 인화와 결속력이 남다른 데에는 육사의 최고 인텔리 기수라는 자부심이 강한 정인균 동기회장의 각별한 동기애도 한몫하고 있다. 임중재(16기·상이군인회장)씨에 따르면, 노태우 정부의 마지막 제병지휘관을 지낸 정장군은 입각 교섭을 받아도 동기회장을 맡고 있기 때문에 다른 일을 할 수 없다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거절할 만큼 동기들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고 한다.

    16기의 동질성과 순수성을 엿볼 수 있는 대표적 사례가 하나회와 윤필용 사건이다. 73년 4월에 발생한 세칭 윤필용 사건이란 박정희 대통령의 부관 출신으로 그의 신임을 한몸에 받으면서 양자설까지 나돌던 당시 수경사령관 윤필용 장군이 술자리에서 한 발언이 문제 되어 윤필용과 그를 따르던 장교들이 대거 구속된 사건을 말한다. 당시 윤필용은 “박대통령이 노쇠했으니 물러나시게 하고 후계자는 이후락 형님이 해야 한다. 내 뒤에는 목숨을 바칠 200명의 장교가 있다”고 발언한 것으로 전해진다. 목숨을 바칠 200명의 장교란 하나회 회원들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손영길, 권익현 등 11기 하나회 회원 10명이 구속되었고, 배명국 등 31명이 예편했으며, 24명은 인사조치되고 160여명이 보안사 감시대상으로 분류되었다. 또 이 사건을 계기로 좌불안석이 된 이후락 정보부장이 초조한 마음에 김대중 납치사건을 벌였다가 해임되기도 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당시 하나회 리더였던 전두환 소령은 화를 면했다. 한국 현대사의 흐름을 바꾼 군내 최대 조직사건인 셈이다. 그러나 16기 하나회 회원은 한 명도 연루되지 않았다. 정인균 동기회장의 배경 설명이다.

    “군내 최대의 조직 사건이었던 윤필용 사건에서 11기가 주축이 된 하나회 출신 장교들이 대거 연루되어 상당수가 옷을 벗거나 징계를 받았는데 16기 중에서는 연루자가 단 한 명도 없었다. 물론 16기에도 하나회 회원이 있었으나 튀는 인물이 없었고 동기생을 질시하거나 밟고 가는 법 없이 다들 맡은 분야에서 묵묵히 복무하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이다. 다들 군 생활을 짧게는 10년, 길게는 40년 동안 했지만 서로 상부상조하고 의지하면서 순탄하게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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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비보다는 제갈양 스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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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기 수석졸업자인 한양대 정형식 교수(준장 예편)는 16기의 또 다른 특질로 합리적인 지성을 들었다.

    “선배들이 기합 주면서 그런 얘기를 많이 했는데, 한마디로 16기에는 저돌적인 사람이 없고 대체로 차분하고 합리적인 사람이 많다는 것이었다. 무골 기질보다는 자기 임무에 충실한 합리적인 현대식 군인, 즉 삼국지의 장비 스타일이 아니라 제갈양 스타일이 많았다. 이에 비해 15기만 해도 저돌적인 사람이 많았다. 물론 학과성적은 군에서 중요하지 않고 진급이나 승진 등 군 경력에 반영되는 비중도 낮다. 그러나 16기에는 공부 잘 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필섭, 이종찬, 최평욱, 천용택씨 등 다 무리하지 않고 점잖고 합리적인 분들이다. 이런 특질은 당시의 시대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육사에 현대식 교육의 기틀이 마련된 것이 이때였기 때문이다.”

    육사 발전에 가장 크게 이바지한 이로 육사인들이 기억하는 교장은 14대 이한림 중장이다. 이장군은 만주 신경군사학교 2기 출신에 일본 육사 57기로 두 학교 모두 당시 박정희 소장과 동기였다. 그러나 이장군은 5·16쿠데타에서 박정희 장군과는 정반대의 입장에 섰다.

    이장군이 육사 교장에 부임한 때는 57년 7월. 2학년 때부터 60년 졸업할 때까지 3년간 16기를 훈육했던 이한림 교장의 재임 기간은 오늘날의 육사로 기틀을 잡은 정비기에 해당한다. ‘육군사관학교 50년사’는 이 시기를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 기간에 장차 육사 발전의 골간을 이룰 제반 분야의 정비와 체계화가 이뤄졌다… 한마디로 ‘발전의 기틀’을 만든 육사의 일대 전환기였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이 기간에 제도의 개혁, 시설의 확충, 교육내용의 강화, 생도 생활의 내실화 등 그 전에 비하여 매우 획기적인 변화가 이루어졌다. 오늘날 육사의 각종 제도는 바로 이때에 그 기반이 형성되었다고 단정할 수 있다.”

    이를테면 이때 비로소 4년제 대학교 설립의 법적 근거인 사관학교설치법과 그 시행령이 설치되었으며, 오늘날 화랑대(花郞臺)라고 불리는 유서 깊은 육사의 명칭이 바로 이 시기에 정해졌다. 진해에서 태릉으로 복귀한 후 전학년 생도가 함께 교육받는 완전한 4년제 교육이 시작됐으며, 화랑연병장·도서관·역할실험실·전기공학실험실 같은 교육훈련 시설과 3군 사관학교 체육대회 같은 각종 행사와 연결된 육사의 전통이 생긴 것도 이때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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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하신 몸’ 이강석과 강재구 소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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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서울의 5대 공립과 지방 명문고 출신의 성적 우수자들이 육사에 많이 몰렸던 데에는 휴전과 서울 환도 후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4년제 대학으로 기틀이 잡힌 시대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덧붙여 흥미를 끄는 것은 당시 ‘귀하신 몸’이 육사에 지망하는 덕분에 육사의 경쟁률이 높아지고 인기가 더 높아졌다는 분석이다. 이기붕 부통령의 아들이자 이승만 대통령의 양아들로 당시만 해도 장안의 귀공자, 황태자로 세인의 주목을 한몸에 받았던 ‘귀하신 몸’ 이강석이 육사에 진학하자 육사의 인기가 하늘을 찔렀다는 분석이다. 그리고 당시 이강석과 함께 육사에 입교한 서울고 동문으로는 육사의 상징 강재구 소령(16기)을 들 수 있다.

    60년에 임관한 강재구 대위가 수도사단 1연대 10중대장으로 부임한 때는 65년 8월. 당시 수도사단은 월남 파병이 결정되어 맹호부대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월남에서의 실전에 대비한 훈련이 한창이었다. 65년 10월4일 오전 10시경 수류탄 투척훈련중 한 중대원이 실수로 안전핀이 뽑힌 수류탄을 중대원 쪽으로 떨어뜨렸다. 일촉즉발의 순간이었다. 그 순간 강대위는 몸을 날려 수류탄을 덮쳤고 이로써 100여명의 부하들은 무사할 수 있었다.

    육군에서는 살신성인한 강대위의 숭고한 정신과 투철한 군인정신을 기려 소령으로 1계급 특진시키고 무공훈장을 추서했으며 그의 부대를 ‘재구대대’로 명명했다. 또 그를 기려 제정한 ‘재구상’은 육군 중대장 시절에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영예로 간주되고 있다.

    이규봉 장군(16기)은 장렬하게 산화한 동기의 후임 중대장(10중대)을 맡아 “재구의 총과 철모를 그대로 갖고” 참전했다. 이장군은 그때의 심경을 “동기가 부하들을 구하고 대신 죽음으로써 파월을 앞둔 우리 중대원들은 모두 정신적으로 결연한 각오를 할 수밖에 없었다”고 회고했다.

    강대위가 강원도 홍천에서 산화할 당시 서울고·육사 동기인 용영일 장군은 재구대대 9중대장이었다. 강재구가 산화하기 전에도 옆에서 지켜본 강중대장의 부하 사랑은 늘 그에게 귀감이자 부담이었다. 역시 서울고·육사 동기인 이중형 장군은 강대위가 죽기 전에 술 한잔을 함께 했는데 그때 그가 불쑥 내뱉은 “인생은 짧고 굵게 사는 거야”라는 말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장렬하게 산화한 동기생의 유품과 유언을 가슴에 품고 월남전에서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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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월 부대의 주축 16기 중대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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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형식 교수는 육사 교수부에 있을 때 월남전에 파병한 육사 기수들을 비교해본 적이 있다. 당시 월남전에 참전했던 맹호·백마부대 중대장들은 16기가 주축을 이루었다.

    “전투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소대장이라지만 월남전에서는 중대장도 위험한 처지에 있었다. 생도 시절 야성적인 선배들은 16기를 질타했지만, 월남전에서 16개 중대장들은 어느 기수보다 더 잘 싸웠다. 차분하고 합리적인 사고의 영향이 크다고 본다. 장비(張飛)형보다는 합리적인 선진교육을 받은 지장이 전투에 더 강하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강재구는 생도 시절부터 영문 소설책을 옆에 두고 볼 만큼 차분한 성격이었지만 의협심이 강했다. 성적도 10위 안에 든 우수생이었다. 나는 강재구가 수류탄을 덮쳐 산화한 이후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흔히 희생 정신을 말하지만 막상 실천하기는 어려운 것인데 당시 육사 교육이 그랬지 않았나 생각한다. 당시 우리는 국가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았을 뿐 아니라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는 그런 내면에 밴 교육을 받았었다. 그런 본능에 가까운 희생 정신이 없었다면 수류탄을 못 덮쳤을 거라고 본다. 그래서 그의 죽음은 동기들의 애국적 희생 정신의 본능을 일깨운 죽음이었고 거룩한 교훈이었다. 우리도 그와 함께 배웠지만 강재구는 배운 것을 실천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존경하는 것이다.”(정형식 교수)

    “어떤 조직이건 오래 된 조직은 독특한 문화의 특성이 있기 마련이다. 육사는 전통적으로 홀수 기수가 개성이 강했다면 짝수 기수는 지성(知性)이 강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50년대 입교 기수(11∼19기) 중에서는 16기가 가장 지성이 강한 기수였다.”(송응섭 장군)

    “당시 경쟁률이 역대 최고여서 공부에 대한 자부심과 고집이 센 동기들인데 동질성이 강한 탓인지 묘하게 서로 단합이 잘 된다.”(신말업 장군)

    “개성이 강한 사람이 없어 인화 단결이 잘되는지도 모른다.”(이필섭 장군)

    물론 육사 16기의 이런 특징에도 불구하고 정권 교체가 없었다면 뒤늦게 빛을 보는 일이 없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이들은 뒤늦게 빛을 본 것이 아니다. 쿠데타를 주도했던 다른 기수의 ‘정치 군인’들과 달리 동기들을 짓밟지 않고 서로 ‘그릇’이 상하지 않도록 감싸주고 의지하는 인화와 동질성에 바탕한 합리적인 지성으로 대기만성(大器晩成)의 저력을 발휘했을 뿐이다. 그리고 이들의 저력 속에는 군부의 쿠데타와 정치적 개입을 반대했던 육사 교장 이한림 장군과 죽음으로 동기생들의 영혼을 일깨운 강재구 소령의 교훈이 녹아 있는 것이다.

    (내외신문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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